현미경의 역사

광학 현미경의 진보

17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의 안토니 반 레이우엔훅(Antoine van Leeuwenhoek)이 단순한 단일 렌즈 현미경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확대 렌즈와 비슷한 구조였던 이 새로운 발명품은 배율이 200x 이상에 달했다는 점에서 달랐습니다. 레이우엔훅은 이 새로운 현미경 덕분에 미생물과 정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로버트 훅(Robert Hooke)은 렌즈 2개, 즉 대물렌즈와 대안렌즈가 있는 복합 현미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코르크 조직을 관찰하였고, 조직이 작은 벌집 모양 세포처럼 보인다는 것에 착안하여 세포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생물학에서 쓰이는 세포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렌즈 2개를 결합하면 정확성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렌즈의 수차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결국 단순한 현미경보다 해상도가 낮아졌습니다.

19세기에는 다양한 조치를 통해 현미경의 해상도가 극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더 좋은 렌즈를 사용하거나 여러 렌즈를 조합함으로써 수차를 보정하였고, Zeiss, Leitz 등의 독일 회사가 수차 보정을 지원하면서 주된 기여자가 되었습니다. 독일의 에른스트 아베(Ernst Abbe)는 현미경을 이론적 및 기술적으로 혁신했으며, 현대적인 광학 현미경의 원형을 확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에는 다양한 관찰 방법이 고안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도입된 위상차 현미경과 1950년대에 발명된 차등 간섭 대비 현미경은 세포처럼 투명한 표본을 고배율로 관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공초점 레이저 현미경 역시 1950년대에 발명되었으며, 이로써 더 선명한 화상을 활용한 관찰이 가능해졌습니다. 형광 현미경은 20세기 초반 무렵에 형광염료가 개발되면서 함께 진화했습니다.

현미경 관찰법이 이처럼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연구원 조지 에어리(George Airy)는 자연광에 기반한 해상도의 한계를 발견했습니다. 곧이어, 에른스트 아베가 개구수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가시광선에서 현미경 표본을 렌즈 성능과 관계없이 최대 200 nm까지 분해할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이로써 확대 관찰을 위한 새로운 도전이 만들어졌습니다.

전자 현미경의 발달

19세기 말에 X선과 전자가 연속해서 발견되었고 1920년대 말에 전자 렌즈 이론이 도입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 개발된 고해상도 현미경은 이러한 단파장 광선을 광원으로 이용한 결과물입니다. 투과형 전자 현미경(TEM)은 1930년대 초에 독일의 에른스트 루스카(Ernst Ruska)가 발명했으며, 1939년에 Siemens에서 최초로 상업화했습니다. 주사 전자 현미경(SEM)의 개발은 TEM과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으로, 1930년대 말에 만프레드 아르덴(Manfred Ardenne)이 투과형 주사전자현미경(STEM)을 개발하였고, 이어서 1940년대 초에 블라디미르 츠보리킨(Vladimir Zworykin)이 현대적 SEM의 원형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츠보리킨이 발명한 SEM은 해상도가 낮았기 때문에 1950년대에 캠브리지 대학교 찰스 오틀리 연구소(Charles Oatley’s laboratory)에서 SEM 개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였고, 그 결과 1965년에 캠브리지 인스트루먼트에서 최초의 상업용 SEM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전자 현미경은 광학 현미경의 한계를 극복하고 해상도를 극적으로 개선했습니다. 이에 따라 원자처럼 작은 물체도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자 현미경은 해상도뿐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 주사전자현미경은 수분이 포함된 표본을 관찰할 수 있도록 낮은 진공상태의 표본실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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